감사화 2020. 11. 21.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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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영주를 다녀오면서 소수서원의 소수박물관 별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는 "선비의 영원한 벗 문방사우"도 잠깐 둘러보고 왔다. 이번 전시회는 올해 2020년 8월 7일(금요일)부터 내년 2021년 4월 30일(금요일)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문방사우(文房四友)가 체계적으로 전시되고 있었지고 내용도 알찼고 문방사우의 무형문화재를 소개받을 수 있어 좋았다. 영주 쪽으로 가는 기회가 있으면 소수서원과 함께 관람을 하면 많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한다.

<문방사우 전시장의 안내 포스터>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없겠지만, 요즈음은 고리타분한 옛날 선비들의 필기 도구 정도로 여기기도 할 것이다. 문방사우란 문인들이 가깝게 두고 친구로 여기던 네 가지 도구인 종이[紙(지)], 붓[筆(필)], 먹[墨(묵)], 벼루[硯(연)]를 의미한다. 넓은 의미로는 서재의 여러 가지 용구를 모두 포함하여 말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문인의 서재를 문방(文房)이라고 하였는데, 훗날에는 문방이 그 곳에서 쓰이는 도구를 지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방사우(文房四友)라는 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홍만선(洪萬選, 1643년 ~ 1715년)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산골에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청신한 일(淸新, 깨끗하고 산뜻함)로서 문방사우보다 좋은 게 없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중국의 문헌에는 문방사보(文房四寶) 또는 문방사후(文房四候)라는 기록이 보인다고 한다.

오랜만에 문방사우(文房四友)에 대해 알아보면서 공부를 하려고 한다. 두 곳에 있는 자료를 정리하였는데, 파란색은 "선비의 영원한 벗 문방사우" 전시회의 팸플릿에서 가져온 것이고, 보라색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번에 제대로 한지와 붓 그리고 먹과 벼루에 대한 견문을 넓혔으니, 서예를 할 때 참고하여 마음에 드는 붓과 먹 그리고 한지를 구해 작품을 만들어 볼까 한다.

1. 종이(紙)

제지술은 후한(後漢, AD. 25년 ~ 220년)의 채륜(蔡倫)에 의해 처음 발명되었다고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는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이 일본에 제지술을 전수하였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으로 보아 이전부터 제작 및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종이는 목판에 새겨진 글이나 그림 등에 먹물을 칠해 찍어내는 인경지(印經紙),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데 사용되는 서화지(書畵紙), 조선시대 함경도에서 많이 생산된 고정지(藁精紙) 등이 있다고 한다.

<한지의 종류와 제조 과정>

종이는 ‘지(紙)’의 글자로 보아 알 수 있듯이, 본래 겸백(縑帛)이라는 비단으로 만든 것을 일컫는다. 그 종이는 값이 비싸고 귀하여 일반 사람들의 이용이 매우 어려웠다. 그리하여 부분적으로 개량이 이루어져 왔던 것이나, 105년에 이르러 채륜(蔡倫)이 나무껍질과 삼 머릿 부분의 식물성 재료를 주로 사용하고 폐품의 비단을 섞어, 종이를 염가로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제지술이 우리 나라에 언제 보급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구려 시대에 벌써 크게 발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610년(영양왕 21년)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종이와 먹 만드는 법을 일본에 전해 준 사실로도 입증된다.

우리나라의 종이는 주로 닥나무[楮]의 껍질을 원료로 하였는데, 그 껍질을 물에 담가 겉껍질을 벗겨 잿물에 넣어 고은 뒤 찌어, 펄프 상태로 만들어 표백한 다음 점액을 섞어 치밀한 발로 떠내어 널빤지 위에 말렸다.

이와 같이 하여 희고 질기고 튼튼한 종이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백추지라 일컬었다. 더욱이 상품의 종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종이를 두텁게 뜨고 풀을 먹여 다듬이질하였다. 그 종이는 반드럽고 빳빳하고 윤기가 나고 질겨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계림지(鷄林紙)를 견지(繭紙)라 애칭하였다. 누에고치실로 만든 견포(絹布)와 같이 종이의 질이 곱고 질기고 반드럽고 윤이 나므로 그와 같이 특칭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학자들은 당나라 때부터 한지(韓紙)를 다투어 수입, 애용하면서 ‘천하소보(天下所寶)’의 종이라 격찬하였다.

조선시대 세종 때에는 조지서(造紙署)에서 표전자문지(表箋咨文紙)와 각종의 색지(色紙)를 만들어 냈고, 또 닥나무의 사용을 줄이기 위하여 닥 1푼에 볏짚·보릿짚·버드나무껍질·뽕나무껍질·율무·삼대 등을 5푼 섞어 만들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의 종이는 원료·용도·상태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게 붙여졌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닥나무를 원료로 사용하여 희고 질기고 반드럽게 만든 책지(冊紙)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종이는 삼국시대부터 대량 생산되어 국내는 물론 중국에까지 널리 보급, 애용되었던 것이다.

2. 붓(筆)

붓은 동물의 털을 모아 원추형으로 만들고 나무를 꽃아 만든 도구로, 글이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문방도구이다. 중국 진나라(秦, BC. 221년 ~ BC. 206년) 몽염(蒙恬)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온다.

모필의 종류에 따라서 족재비 꼬리털로 만든 황모(黃毛), 쥐의 수염 털로 만든 서수(鼠鬚), 노루 겨드랑이 털로 만든 장액(獐腋), 이외에도 토모(兎毛, 토끼털), 구모(狗毛, 개 털) 등이 있다. 이런 모필로 만든 황모필, 서수필, 장액필, 토모필, 구모필, 갈필(葛筆, 칡뿌리 끝을 두드려 만든 붓) 등이 있다.

<붓의 분류와 제조 과정>

붓은 진(秦)나라의 몽염(蒙恬)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진나라 때 몽염이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은(殷) 나라 때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개량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주(周)나라 때 죽백에 붓으로 글을 썼다는 점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나뭇가지나 댓가지에 먹을 묻혀 베껴 썼으나, 그것이 불편하여 부드러운 짐승 털로 바꾼 것이라 전하여진다. 붓은 그 털의 품이 가장 중요하다. 그 재료로는 양·여우·토끼·호랑이·사슴·산돼지·살쾡이·이리·담비·개·말의 털 등이 사용되었음을 문헌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붓은 모양과 용도에 따라 장봉(長峰)·중봉(中峰)·초필(抄筆), 그리고 심을 박은 붓과 박지 않은 것 등이 있다. 그 제조에 있어서 털이 뻣뻣하고 뾰족할 것, 털이 많으며 가지런할 것, 털 윗부분이 끈으로 잘 묶여 둥글 것, 털이 오래 써도 힘 있을 것이 기본 조건이라 일컫는다.

붓털로는 산토끼털이 좋은데, 그것도 높은 산이나 험준한 산속에 사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토끼가 살찌면 털이 길고 빳빳하며, 겨울과 가을에 얻은 것이면 더욱 힘 있고 굳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붓은 낭미필(狼尾筆)이 좋다고 중국에 알려졌다. 그들은 이 붓으로 백추지(白硾紙:닥나무를 원료로 만든 우리나라의 종이)에 쓰는 것을 매우 귀중하게 여겼고, 특이한 외국의 산물이라 손꼽아 왔다. 중국에서 말하는 낭미필은 황모필(黃毛筆)·황서필(黃鼠筆)이라는 것으로,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을 말한다. 중국의 문헌에서 서랑모필(鼠狼毛筆) 또는 성성모필(猩猩毛筆)이라 한 것도 바로 이 붓을 뜻한다. 그것이 일찍부터 중국에 수출, 애용되었을 만큼 품이 좋고 유명하였다.

3. 먹(墨)

먹은 벼루에 물을 넣고 갈아서 먹물을 만들 때 사용한 문방 도구로, 우리나라는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이 일본에 먹 만드는 법을 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먹은 원료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데, 소나무를 태워 그 그을음을 받아 만든 송연먹(松煙墨), 식물의 씨앗을 재료로 만든 유연먹(油煙墨), 현재 주로 사용하는 일명 카본 먹이라고 불리는 양연먹(洋煙墨)이 있다.

<먹의 분류와 제조 과정>

먹이 언제 생산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철경록 輟耕錄≫에 의하면, 고대에는 필사용으로 칠(漆)이 사용되었고, 그 뒤 돌먹으로 대치되었으며, 위진(魏晋) 때에 와서 비로소 옻나무 그을음과 소나무 그을음을 섞어 만든 먹이 이용되었다. 위진 때에 송연계(松煙系:소나무를 태운 그을음, 먹의 원료임)의 먹이 사용되었음은 ≪조씨묵경 晁氏墨經≫에도 적혀 있다.

우리나라의 먹에는 소나무 그을음을 재료로 한 송연묵(松煙墨)과 기름을 태운 그을음을 재료로 한 유연묵(油煙墨)이 있다. 앞의 것을 숫먹이라 하고, 뒤의 것을 참먹이라 한다. 그중 숫먹이 일찍부터 생산되어 고구려 때는 중국으로 대량 수출되었다. 그중 관서지방(關西地方)의 맹주(猛州)·순주(順州)·평로성(平虜城)에서 만든 먹이 유명하였다.

신라에서 만든 먹도 널리 알려졌다. 당나라 말기에는 우리 나라의 해초(奚超)가 아들 정규(廷珪)와 함께 흡주(歙州)로 옮겨 살며 먹 제조로 크게 성공하여 남당(南唐)으로부터 이씨(李氏)의 성까지 받았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숫먹은 소나무 그을음 10근, 사슴 아교 4근, 물 10근의 비율로 섞어 만들어 냈다. 참먹은 기름을 밀폐된 방에서 태워 그 위에 덮은 기와에 그을음을 앉게 하고, 그 그을음과 아교, 그리고 물을 일정한 비율로 배합하여 만들어 냈다.

해주산품(海州産品)이 유명하며, 한림풍월(翰林風月)·초룡주장(草龍珠張)·수양매월(首陽梅月)·부용당(芙蓉堂)의 것이 손꼽힌다. 그중에서도 한림풍월과 초룡주장의 것이 상품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래되고 있는 고려 및 조선 초기의 목판본을 보면, 먹색이 시커멓고 윤이 나며 향기가 좋다. 이것은 모두 숫먹을 썼기 때문이다. 한편, 금속활자본은 먹색이 희미하고 윤이 나지 않는 편인데, 이는 참먹을 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참먹은 먹색이 희미하고 윤이 나지 않는 편이지만, 쇠활자에 착묵(着墨)이 좋고 필사하는 데 먹물이 걸지 않아 운필이 잘 되는 것이 그 장점이다.

4. 벼루(硯)

벼루는 먹을 갈아 붓글씨를 쓰기 위한 문방 도구이며, 크게 형태와 문양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형태에 따라서는 풍자연(風字硯), 매미연, 일월연(日月硯), 안상연(眼象硯), 문방연(文房硯) 등으로 구분된다. 또한 문양에 따라서는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를 상징하는 어문연(魚紋硯), 다산(多産)과 다복(多福)을 상징하는 포도문연(葡萄紋硯), 선비를 상징하는 매화문연(梅花紋硯), 이외에도 용연(龍硯), 호연(虎연硯) 등이 있다.

<형태와 문양에 따른 벼루의 분류>

≪고려도경≫에 따르면 “연왈피로(硯曰皮盧)”라 하여 이미 고려 때부터 벼루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보통 돌로 만들지만 와연(瓦硯)·도연(陶硯)·자연(磁硯)·이연(泥硯)·토제연(土製硯)도 있으며, 보석류나 금석류로도 만든다.

이 가운데서도 충청남도 보령의 남포지방에서 나는 남포석(藍浦石)을 가장 으뜸으로 치는데, 먹을 갈 때 매끄러워 조금도 끈적거리지 말아야 하며, 묵지(墨池 : 묵즙을 모으도록 된 오목한 곳으로 硯池라고도 한다.)에 물을 넣어 두어 10일 이상 되어도 마르지 않는 것을 좋은 벼루로 친다.

크기는 서당연(書堂硯)처럼 큰 것에서부터 손가락만 한 행연(行硯 : 여행용 벼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형태 또한 원형·4각형·6각형·8각형·12각형·타원형에서부터 여러 가지 물건의 모양을 본뜬 구연(龜硯)·연화연·풍자연(風字硯)·태사연(太史硯)·금연(琴硯)·석고연(石鼓硯)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각 문양은 용·학·거북·봉황·포도·매화·난초·국화·대나무·불로초·감·물고기·팔괘(八卦)·십장생(十長生)·소상팔경(瀟湘八景) 등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문자를 돋을 새김 하거나 오목 새김 한 것도 있다.

현재까지 전해 오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중국 한대의 것으로서, 중국 본토와 낙랑무덤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이 중 채협총(彩篋塚)에서 출토된 벼루는 장방형의 판연(板硯)으로 칠이 된 연대(硯臺)에 고정시킨 것이고, 평안남도 평원의 석암리9호분(石巖里九號墳)에서 출토된 벼루의 경우 둥근 목대(木臺)에 붙여 세 발로 받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묵지가 없는 평평한 것인데, 먹을 개기 위한 연구(硏具, 磨石)가 딸려 출토된다.

묵지가 있는 벼루가 출현한 것은 남북조시대부터인데, 이때는 원형·방형의 벼루가 가장 많다. 당나라 이후에는 풍자연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문방구 애완의 풍조가 유행하면서 기형도 다양해졌다.

도연은 남북조시대부터 사용되었는데, 원형으로 주변이 낮아지거나 홈이 둘러진 것으로, 원대 아래는 많은 제각(蹄脚)이 받치는 형태로 된다. 당대에는 동작대(銅雀臺)의 옛 기와를 가지고 만든 와연이 유행하며, 도제의 풍자연도 생산되었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도제의 원형 벼루가 만들어졌으며, 삼국에서 모두 간소한 제각이 달리고 뚜껑이 있는 백족연(百足硯)이 사용되었고, 이와 함께 석제 원형 벼루도 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연지(硯池) 외벽과 발에 조각이 된 벼루도 나타났다.

그런데 대체로 석연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시대 이후라고 생각되는데, 현재 발굴되는 고려시대 무덤에서는 부장품으로 석제벼루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형태는 장방형을 주축으로 하여 풍자연·금연 등 다양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크기·형태와 장식의 종류가 더욱 다양해져 석연뿐 아니라 자연(磁硯 : 자기로 만든 벼루)도 생산되었다.

우리나라의 석연재(石硯材)는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데, 무산·위원·평양·장산곶·정선·평창·장단·단양·계룡산·남포·안동·경주·언양·장수·강진 등이 대표적인 산지로 꼽힌다.

<문방사우에 관한 시(詩)>

 

문방사우(文房四友)

 

새하얀 한지 마주하고 앉으면

마음 또한 티없이 맑고 밝아져

저절로 무심에 이르고

 

잘 간 먹 담긴

작은 웅덩이에 첨벙 목욕시킨 붓

끝 가지런히 모아서

 

한 획 한 자 써내려가면

옛 성현들의 주옥같은 말씀 들려와서

마음의 양식 차곡차곡 쌓이며

 

방안 가득 그윽한 먹향기

사군자도 질세라 앞다퉈 나서니

그대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 그 누가 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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