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만에 애들 아빠 고향을 다녀왔다. 아침 일찍 둘째에게 보낼 반찬거리를 마련하여 당일 택배로 보낸다고 정신이 없었지만, 무르익는 가을을 직접 느껴보려고 길을 나섰다. 밤부터 비가 내일까지 내린다고 하여 비가 오기 전에 다녀오는 것이 나을 것 같았고, 그동안 텃밭 식구들과 대봉감과 사과도 얼마나 영글었는지 보고 싶었다. 시골에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지나 있었다. 면소재지로 들어서는 도로변에 늘어선 사과밭에는 벌써 사과들이 발갛게 영글어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햇볕이 두텁지 않았는데도 저렇게 자연은 곱게도 채색이 되어 있어 놀라웠다.
언제나처럼 오늘도 마을에 들어서도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동네 한가운데 있는 텃밭 담장에는 벌써 구기자가 빨갛게 익어있고 울타리 역할을 하며 큼직하게 자란 탱자나무에는 탱자가 노랗게 물들어 있다. 여전히 붉은 고추가 곱게 영글어 있고 감나무에는 감도 덩달아 점점 주황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선산 쪽 텃밭으로 가는 길에 지나간 사과밭에는 발그레 익어가는 사과들의 수다로 귀가 간지럽고 배롱나무 밭 가운데와 한쪽 비탈진 곳에 서 있는 대봉감나무에는 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대봉들이 큼직하게 자라 막걸리라도 몇 잔 마신 냥 벌겋게 취한 얼굴이었고, 홍시도 드러 보였다.
성묘를 하러 갔는데 산소 옆에 하얀 제비꽃이 피어 있어 사람만 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꽃들도 철없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지난번에 영산홍과 아로니아꽃 및 배꽃이 철도 모르고 피었다고 했었는데, 봄에 피는 제비꽃까지 피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연이라는 것은 지수화풍의 조건에 따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다고 했는데, 그 조건이 맞아서 철도 아닌데 꽃을 피운 것이 아닐까 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을을 맞으면 다른 계절과는 달리 좀 더 성숙해지고 깊고 멀리 내다보려는 마음이 앞선다. 그래서 가을을 사색의 계절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텃밭에 심은 무와 배추는 잡초 속에서도 아무런 병충해도 입지 않고 잘 자라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마도 마을과 제법 떨어져 있다 보니 병충해 피해가 적지 않았을까 한다. 도시에서 허둥지둥 살면서 자연을 깜빡 잊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자연은 정해진대로 그 사이에 많은 변화를 만들어 무척 놀라고 당황하게 한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언제 대봉감이 익을까 했는데 보름 사이에 홍시가 된 것도 있고 주황색으로 곱게 익은 것도 있다. 사람들이 봤을 때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냥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대상은 불철주야 끊임없는 노력과 정성을 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삶도 자연만큼 있는 그대로 저절로 힘쓰고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열정으로 살아간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자신만의 멋진 소풍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몸의 각종 부위는 나이가 들수록 기능이 저하하고 오작동을 하거나 어려움을 겪으며 노화할지 모르겠지만, 정신만큼은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매 순간 더 발전하고 향상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깊어가는 가을 속에서 자신의 참모습과 일체가 될 수 있도록 발심(發心)하여 살아있는 동안은 항상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몸은 체력 증진에 힘써 노화를 늦추고 마음은 매 순간 향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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