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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오늘을 위해/알아서 남 주나

토정비결과 토정 이지함

by 감사화 2021.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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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한 해의 운수와 길흉을 알아보기 위해 토정비결을 보는 것이 연중행사와 같은 때도 있었다. 옛날 고향 마을에 책력(冊曆)을 가지고 토정비결을 보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정초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물론 다른 마을 사람들까지 신수(身數, 한 사람의 운수)를 보러 찾아오곤 했다. 그때는 토정비결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왜 신수를 보는지에 대해 의문도 가지지 않았었다.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나거나 당하는데, 새해가 되면 그해에 어떤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지를 미리 알 수 있으면 예기치 않는 사고라든지 문제에 대비할 수 있어 좀 더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본다거나 점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오늘은 토종비결이 무엇인지와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선생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지함 선생의 일화들을 차례로 소개할까 한다. 토정비결은 한국세시풍속사전에 나오는 내용으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선생에 관한 내용은 한국사상사와 문화원형백과에서 가져왔고, 이지함 선생의 일화는 문화원형백과와 며칠 전 아는 분으로부터 카카오톡으로 받은 내용을 조금 다듬은 것이다. 요즈음은 인터넷에서 무료로 토정비결을 봐주는 곳이 있어 재미 삼아 한 번 봤는데, 의외로 올해 신수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점을 보거나 운수가 어떻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좋으면 괜찮은데 좋지 않다고 하면 괜히 마음이 쓰인다. 그래서 가능하면 점이나 신수는 보지 않으려고 한다.

끝부분에 올린 토정 이지함 선생과 과거 보러 가는 선비와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지만, 사람의 상(相)이나 운명(運命)이라는 것은 태어날 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자신의 행실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불교에서 자주 듣는 말이지만, 지금의 나에게 나타나는 일들은 과거의 내가 했던 행적의 결과이고, 미래에 내게 나타나는 일들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언행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지만 미래의 운명은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얼마든지 자신의 앞날에 대한 운수는 스스로 결정해 나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운명을 바꾼 예로, 중국 명나라의 원요범(袁了凡) 선생도 얼마든지 운명은 바꿀 수 있다고 했다.

1. 토정비결(土亭秘訣)

『토정비결』은 조선 중기의 학자 토정() 이지함()이 지은 도참서()로 개인의 사주() 중 태어난 연·월·일 세 가지로 육십갑자()를 이용하여 일년 동안의 신수를 열두 달별로 알아보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오행점()으로 한 해의 신수를 본다고 적혀 있어, 정초에 토정비결을 보는 풍습은 정조 이후인 조선 말기부터 세시풍속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이전까지 오행점ㆍ농점ㆍ윷점 등으로 한 해의 농사나 가정의 화목을 점치던 것에 비해, 조선 말기 민생의 곤궁이 심해지자 보다 개인적이고 세분된 예언을 희구하던 시대적 요청에 따라 등장하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전에는 주로 동네에서 한학을 공부한 어른들을 찾아 토정비결을 보았으나 1970년대 이후부터는 거리에 토정비결을 봐주는 점복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근래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인터넷 토정비결도 성행하고 있다. 정초의 세시풍속에 유난히 점복적인 요소가 강하듯이 새해를 맞아 한 해에 대한 기대심리와 놀이적 요소가 복합된 풍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토정비결을 보는 방법은 백단위인 상괘(), 십단위인 중괘(), 일단위인 하괘()를 합하여 세 자릿수로 된 괘를 완성시켜 책에서 해당 숫자를 찾아보면 된다. 백 단위는 나이와 해당 년의 태세수()를 합한 뒤 8로 나눈 나머지 숫자이며, 나머지가 없으면 8이다. 십단위는 해당 년의 생월 날짜 수(큰달은 30, 작은달은 29)와 월건수()를 합해 6으로 나눈 나머지 수, 일단위는 생일수와 일진수()를 합한 뒤 3으로 나눈 나머지 수이다. 이렇게 해서 얻은 세 단위의 숫자를 찾으면 그해의 전체 운수에 대한 개설이 나오고, 이어 월별 풀이가 나온다.

특히 열두 달의 운세를 4언3구의 시구로 풀이하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은 ‘뜻밖에 귀인이 내방하여 길한 일이 있다.’, ‘구설수가 있으니 입을 조심하라.’, ‘봄바람에 얼음이 녹으니 봄을 만난 나무로다.’ 등과 같이 주로 부귀ㆍ화복ㆍ구설ㆍ가정 등 개인의 길흉화복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중국에서 당시 유행하던 여러가지 술서를 인용해 엮었다 한다.

<토정비결의 예>

<출처 : 한국세시풍속사전>

2.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이지함(菡, 1517년 ~ 1578년)은 본관이 한산()이고, 자는 형백()·형중()이며, 호는 수산()·토정()이고 시호는 문강()으로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이다. 중종 12년에 태어나 선조 11년에 타계하였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 지번()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서경덕 문하에서 잠깐 수학하였다. 그는 목은 이색의 6대 손이며, 그의 형 지번은 청풍() 군수를 지냈으며, 이지번의 두 아들 중 이산해()는 영의정을 지냈고 이산보()는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전연 뜻을 두지 않고 은둔과 기행 그리고 유랑하면서 지냈다.

그가 관직에 뜻을 두지 않게 된 것은 그의 젊었을 때 친구인 안명세()가 사관으로 있으면서 을사사화의 진상을 직필해서 특정기()에 넣어둔 것이 누설되어 권신의 미움을 받아 처형된 것을 보고 관직에 대한 혐오감과 인생의 허무를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스승 서경덕의 처사적 은둔 도피적 기질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60세 가까이 되어서야(선조 6년) 특채되어 포천 · 아산 현감을 지내게 되었다. 아산 현감 재직 시 걸인수용소를 만들어 관내 걸인들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수업()을 가르쳐서 스스로 의식을 해결하도록 하는 자립심을 키워주었다.

그는 당당하고 늠름한 풍채와 기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맑고 웅장하였으나 말수는 적었다고 한다. 그는 특이한 체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파격적인 기행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엄동설한에도 홑옷만 입고 지내기도 하였으며, 눈 위에 눕기도 하였다고 한다. 10여 일씩 절식을 하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한 끼에 한 말의 밥을 먹기도 하였다고 한다. 충청도 보령에서 서울로 나들이할 때에는 한꺼번에 한말의 밥을 다 먹고 이틀간 걸어서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항상 죽장을 짚고 다녔는데, 졸리면 한길에서 선 채로 죽장을 짚고 자곤 하였으며, 소나 말이 밟아도 꿈쩍하지 않고 잤다고 한다. 잠들면 코 고는 소리가 요란해서 소와 말도 피해 갔다고 한다. 그는 신혼 다음날 거리에 나갔다가 추위에 떠는 거지 아이를 보고 자기의 새 도포를 벗어준 일도 있으며, 흉년을 만나면 구호곡을 마련하고자 가끔 큰 장사를 하여 많은 이득을 얻으면 모두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개관 사업도 하여 수천 석의 곡식을 장만하였으나 이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 자신은 항상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는 마포강변에 토실()을 지어놓고 밤에는 그곳에서 자고 낮에는 그 위를 거닐면서 정자 삼아 지냈다고 한다. 토정(土亭)이란 그의 호도 여기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그는 외출할 때는 쇠붙이로 만든 관을 쓰고 다녔으며, 밥을 지을 때는 그것을 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도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무명의 어부였고, 가장 사랑하는 제자는 노예 출신의 서치무()와 서기()였다.

그는 항상 좌중을 웃기는 농담을 잘하였고, 익살 섞인 직언을 서슴없이 하였다고 한다. 그는 여행을 좋아해서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였고, 노()도 없는 일엽편주로 제주에도 3번이나 갔다고 한다. 그는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였으며, 이이와는 친구로서, 조헌과는 그의 스승으로서, 그 외 조식과는 처사적 기질의 공유자로서 사귀었다. 『연려술기술』에 의하면 당대의 명사인 서경덕(), 조식, 성운(), 이지함이 성제원()의 매개로 충청도 보은에서 만나 수일간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물욕이 없어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면서도, 천문 · 지리 · 의약 · 복서() · 음양 · 술서() · 음악 · 산수() · 관상 · 약방문 등을 연구하여 그것들에 능통하였으나 저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저서로는 『토정 집』2권이 남아 있으며, 그의 저서로 간주되는 『토정비결』이 전해지나 그의 저술인지에 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출처 : 실학의 선구사 기인 경세가 이지함, 한국사상사, 2002. 2. 28., 이진표>

이지함()은 본관 한산(). 자 형백()·형중(). 호 수산()·토정(). 시호 문강(). 《토정비결( )》의 저자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숙부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에게서 글을 배우다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갔다.

경사 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유일()로 천거되어 6품직을 제수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다음 해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경사자집()은 중국 고전의 경서·사서·제자류()·시문집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박순()·이이()·성혼() 등과 교유했으며, 당대의 일사() 조식()은 마포로 그를 찾아와 그를 도연명()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포천 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 등에 피력되어 있는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 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이지함은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조선시대 도가적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해동이적()》에도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김계휘()의 질문에 이이가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기인적 풍모를 대변해 주고 있다.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 보은의 화암서원()에 제향 되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稿)》가 전한다.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토정비결과 한국인,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3. 토정 이지함 선생의 일화

토정에 대한 일화는 많다. 마포에 토정, 즉 흙으로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는 말도 있는데 그가 가난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평생 많은 돈을 모았지만 대부분 빈민 구제에 썼다. 그가 돈을 모으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나오는 매점 매석식 돈벌이는 토정을 모델로 한 게 아닐까 싶다. 또 하나의 방법은 농가에서 콩이나 팥 등을 조금씩 얻어다 무인도에 심어놓고 가을에 가 거둬다 팔기이다.

또, 여행을 좋아했기 때문인지 전국을 많이 돌아다녔으며 특히 제주도에는 여러 번 다녀왔다. 그리고 배를 타고 다니다 풍랑을 만날 것을 대비해 뒤웅박 여러 개를 차고 다녔으며, 그보다 유명한 것은 쇠로 만든 갓이다. 그 갓을 쓰고 다니다가 밥을 지을 때 솥 대신 썼다고 한다.

1578년 아산 현감을 지낼 때, 늘 잡곡밥과 시래깃국으로 식사를 하면서 <걸인청>을 만들어 빈민을 구제하고 선정을 베푼 이야기는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이지함은 단순한 기인이 아니라 당대의 선각자였을 것이며, 특히 그가 상업에 능했고 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은 현대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인 얼굴 유형,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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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土亭) 선생께서는 언젠가 천안 삼거리에 위치한 한 주막집에 머무르시게 된 적이 있었다 한다. 마침 그 주막에는 각 지에서 올라온 젊은 선비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한양에서 곧 있을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과거에 급제(及第)하기를 바라고 공부를 해온 그들인지라 당대(當代)에 큰 학자이시며 기인으로 명성(名聲)을 크게 떨치고 계신 토정 선생의 방을 찾아가 한 말씀을 듣고자 모이기에 이르렀다. 여러 젊은이들을 말없이 바라보시다가 문득 한 젊은 선비를 향해 이르시기를

"자네는 이번 과거에 급제할 운이 없으니, 서운하겠지만 그냥 고향에 돌아가시게나."라고 하셨다.

모두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민망해진 그 젊은이는 말없이 일어나 인사를 드리고는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왔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청천벽력 같은 말에 아연해진 그 선비는 멍한 느낌에 주막을 나와서는 대문 옆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아 생각에 잠기었다.

'그동안 과거 급제를 목표로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해 왔는데, 시험을 보기도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면 고향에선 나를 못난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테고, 대학자이신 선생의 말을 무시하고 과거를 보러 가서 정말 낙방이라도 하면 평소에 흠모해 온 토정 선생의 말씀을 우습게 아는 놈이 되겠고,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멀거니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마침 수많은 까만 개미떼들이 줄을 지어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 바로 앞을 좌에서 우측으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좌측으로 눈길을 돌려 바라보니 그 뒤로도 끝없는 개미들이 줄지어 앞의 개미들을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도대체 이 개미들은 어디를 향해 이렇게 질서 정연하게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에 몸을 일으켜, 그 선두에 선 개미를 보기 위해 걸어가 보게 되었다. 가다 보니 선두에서 가고 있는 개미가 있는 곳으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아니한 곳에 큰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고 그 독 안에는 물이 가득 차 금시라도 넘칠 듯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부엌에서 쓰고 버린 허드렛물이 배수 하수관을 통해 항아리에 떨어지게끔 되어 있었고, 물이 가득 차게 되면 자체의 무게로 인해 독이 기울어져 도랑 쪽으로 물이 쏟아부어지도록 만든 구조였던 것이다. 이제라도 부엌 쪽에서 누군가가 물을 버리면 그 독이 기울어져 이동하고 있는 개미들의 선두를 향해 쏟아지면 저 많은 개미들이 때 아닌 물벼락을 만나 다 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뛰어가 구정물이 가득한 독을 힘들게 옮겨 도랑에다 대고 얌전스레 부어버렸다.

다시 빈 독을 옮겨 제 자리에 갖다 두고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개미의 긴 행렬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가고 있다. 그것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이 젊은 선비는 한참 후 토정 선생이 하신 우울한 말씀이 다시 생각나, 조금 전에 앉았던 자리로 되돌아가 쪼그려 앉아 다시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네, 거기서 무엇을 하는가?"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언제 나오셨는지 토정(土亭) 선생께서 대문 앞에 서서 자신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었다.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니 선생께서 젊은 선비를 향하여 다가오신다. 가까이 와서 젊은 이를 보시더니 이번에는 토정(土亭) 선생이 흠칫 놀라며 이렇게 묻는다.

"아니, 자네는 아까 방에서 내가 낙방(落榜)할 운(運)이니 고향으로 내려가라 한 바로 그 젊은이가 아닌가?"

젊은 선비가 그러하다고 하니, 토정 선생이 머리를 갸웃거리시며 하시는 말씀이

"내가 조금 전에 자네에게 얘기를 할 때 본 자네의 상(相)과 지금 보는 자네의 상(相)이 완전히 다르니 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네."

"얼굴에 광채가 나고 서기(瑞氣)가 충천(衝天)하니 과거에 급제를 하고도 남을 상(相)인데,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상(相)이 바뀌었단 말인가?" 하신다.

젊은 선비는 너무나 황당하여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냐며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선생께서 재차 물으시기를

"잠깐 사이에 자네의 상이 아주 귀(貴)한 상(相)으로 바뀌었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을 테니 내게 숨김없이 말씀을 해 보시게." 하신다.

젊은이는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만..." 하고 말씀을 드리다가 문득, 항아리를 옮긴 일이 생각이 나서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을 소상히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선생께서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시고는 혼잣말로 말씀하시길, "수 백, 수 천의 죽을 생명(生命)을 살렸으니, 하늘인들 어찌 감응(感應)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다시 젊은 선비에게 이르시기를

"자네는 이번 과거에 꼭 급제를 할 것이니 아까 내가 한 말은 마음에 두지 말고 한양에 올라가 시험을 치르시게." 하시고는, 젊은 선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고난 뒤, 주막 안으로 들어가셨다.

과연 이 젊은 선비는 토정(土亭) 선생의 말씀대로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리고는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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