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일에 올 들어 첫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전하고는 잊고 지내다가 어제 문득 생각이 나서 오늘 오후 늦게 매화를 만나러 나섰다. 내일부터 다시 기온이 내려간다고 해서 먼저 약수터부터 가서 운동도 하고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첫 매화를 봤던 매화나무쪽으로 향했다. 그 사이 섭씨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진 강추위에 한송이 피었던 매화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하는 걱정도 하였는데, 가서 보니 지난번보다 더 많은 꽃송이를 피우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꽃은 피우고 있지 않고 띄엄띄엄 가지 여기저기에 한 송이씩 매화가 피어 있었지만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답고 향기도 지피고 있었다. 지난번 강추위로 한고비를 넘겼다 여기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교정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 홀로 서서 매년 봄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주었는데 올해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겨울에도 매화를 피워 봄을 그리는 마음에 그윽한 향기까지 채워주고 있다. 매화는 언제 봐도 고매함을 잃지 않고 밤낮을 가리지 않으면서 겨울 내내 피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상촌(象村) 신흠(申欽) 선생은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즉 "매화는 한 평생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라고 읊었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일생 동안 매화에 대한 시를 107수나 지었는데, 그중에 71수를 모아 생전에 매화 시첩을 만들기도 했다고 하며, 돌아가시는 날도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였다고 전하니 매화 사랑은 향기처럼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오늘은 퇴계 선생의 매화에 관한 시 중에 "옥당억매 임인(玉堂憶梅 壬寅)"이라는 작품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玉堂憶梅 壬寅(옥당억매 임인)
-옥당에서 매화를 생각하며 임인년에 짓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한 그루 뜰앞 매화 가지마다 가득 눈이 쌓이고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차지) 어지러운 세상일들로 꿈속에서도 뒤척이는데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옥당에 홀로 앉아 봄날 밤 달을 바라보고 있으니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기러기 울음소리에 애달픈 생각만 이는구나.
어느 봄날 밤 퇴계 선생은 옥당(홍문관[弘文館],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로 학문적·문화적 사업에 주도적 구실을 한 기관,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과 더불어 삼사(三司)라고도 했음)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데, 마침 뜰에 서 있는 매화나무 가지마다 하얀 눈꽃송이가 소복소복 쌓이는 가운데 어지러운 세상 일들로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바깥을 내다보니 교교히 달빛이 내리는 가운데 아무런 걱정도 없이 날아가는 기러기떼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니 스스로의 모습이 가련하여 애달프기만 하다는 작품인데, 그날 밤의 모습이 또렷하게 한 폭의 그림처럼 그리지는 듯하다. 중부지방은 내일 밤부터 눈이 내린다고 하는데, 여기도 눈이 오며 설중매(雪中梅)를 볼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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