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전(3월 29일)에는 터질 듯 꽃망울이 부풀어 있기만 했는데, 오늘 다시 가보니 아름답게 피어나 화사하게 웃고 있는 배꽃을 즐길 수 있었다. 봄꽃들은 대부분 잎이 돋아나기 전에 꽃부터 피우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배꽃 역시 소복을 입은 여인처럼 다소곳하면서도 기품 있게 꽃만 가지에 곱게 피어 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벌들이 잉잉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배꽃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배꽃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봄햇살이 따사로운 가운데 바람이 강하게 불어 햇볕을 가리려고 쓴 모자가 아예 배꽃을 보지도 못하게 얼굴을 짓눌러버릴 정도로 심하게 불었다.
재작년부터 배나무에 배꽃이 피기 시작했지만 그해는 배가 열리지 않았고, 작년에 4개가 달렸는데 태풍으로 중간에 떨어지고 고작 한 개만 맛볼 수 있었다. 시골 텃밭의 배와 함께 가게에서 사 먹는 배와는 당도도 당도지만 부드럽고 싱싱하여 맛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올해는 수확할 때까지 몇 개나 달려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양은 좋지 않아도 맛만은 가족들 모두가 인정하기 때문에 많이 달리기를 기대해 본다. 배나무는 이른 봄에 가지치기를 하고 퇴비를 듬뿍 준 뒤, 여러 개 매달린 열매 중에 충실한 것 하나만 남기고 모두 따준다. 그러고 나서 매실 크기 정도가 되면 봉지를 씌운다.
봉지를 씌우지 않고 그냥 둬 보기도 했는데, 벌레보다는 새들이 가만히 두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봉지를 씌우게 되었다. 봉지를 씌우고 난 뒤로는 영글 때까지 기다리며 관찰만 한다. 이렇게 해서 추석을 전후로 하여 영근 장도를 봐가면서 수확을 하는데, 중간에 배나무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는 일 외에는 비료도 주지 않고 농약은 더더욱 치지 않는다. 상품으로 판매할 것도 아니고 오로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맛을 보는 정도이기 때문에 정성만 기울일 뿐이다. 지금까지 몇 개 되지 않은 수확이었지만 가족들 모두가 맛이 최고라고 하면서 배나무 모종을 더 심자고 하여 몇 그루를 더 심어두었다.
배꽃이라고 하면 학교 다닐 때 외웠던 고려 말기 문신이었던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 1269년 ~ 1343년) 선생의 "이화에 월백하고"로 시작하는 시조인 다정가(多情歌)가 생각이 난다. 다정가에 보면 배꽃은 이화(梨花)라고 하며, 달밤에 보는 것이 더 운치가 있을 것 같다. 교교히 비치는 은빛 달빛 아래 백옥 같은 배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봄날이면 되살아나는 지난날의 추억들이 밤잠을 설치게 만들고도 남을 것 같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봄을 느끼는 마음은 나이와 상관없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잊고 있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이조년 선생의 다정가를 오랜만에 읊어본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 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
배나무는 장미과 낙엽활엽 교목으로 2 ~ 3m까지 자라고, 4 ~ 5월에 흰꽃이 피며, 8 ~ 10월에 수확을 한다. 겉은 황금색(황색)이고 속살은 흰색이라서 백의민족의 과실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열매인 배는 술독이나 갈증을 풀어주고, 기침과 가래를 삭이며, 가슴이 답답하거나 나쁜 열이 몰려 얼굴이 붉어지는 증상 또는 중풍과 관련한 담과 일반 담도 몰아내는 효능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면역 작용을 관장하는 비장과 연관이 있다. 또한 배나무 잎은 갑자기 토하고 설사를 하는 곽란에 좋다고 한다. 배의 성질은 차갑고, 맛은 달고 시며, 가을에 수확하여 생 것을 그대로 먹으면 된다고 한다.
'꽃과 풀 그리고 차 > 꽃과 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편단심 민들레꽃 (0) | 2021.04.05 |
---|---|
무리 지어 피어난 줄딸기꽃 (0) | 2021.04.02 |
임광사의 봄꽃 향연 (0) | 2021.03.30 |
밤에 보면 더 아름다운 벚꽃 (0) | 2021.03.29 |
활짝 핀 벚꽃을 보며 (2) | 2021.03.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