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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찰을 찾아서

초겨울에 찾아간 부석사(浮石寺)

by 감사화 2020.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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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요일(11월 17일) 몇 년 전에 다녀오고 오랜만에 다시 부석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당일로 소수서원과 부석사를 둘러보는 오려고 하니 아침 일찍 서둘러야 했다. 오전 8시 40분쯤 집에서 출발을 해서 안동 휴게소에서 잠깐 쉬었다가 영주 부석사 부근의 순흥전통묵집에서 도착하니 오전 11시 30분경이었다. 간단히 전통묵밥을 들고는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둘러보고 부석사로 향했다. 소수서원에서 부석사까지는 약 14.5km로 20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과 밭, 특히 사과밭은 치열했던 농사일의 과정들이 남긴 흔적들은 보이지 않고 허전함과 편안함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부석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주차 요금부터 지불해야 하는 시스템이 늘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누가 주차장을 만들어 돈벌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딜 가나 사찰 입구에 주차장을 만들어 사찰 관람료보다 비싼 주차 요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 마치 바가지를 쓰는 것 같아서 입맛이 씁쓸하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천천히 걸어 부석사 입구로 향하는데, 이전에 왔을 때는 길가의 상점이나 노점상에 관람객들이 북적거리면서 물건을 사는 모습들이 보였는데, 코로나 19의 영향과 평일이라서 그런지 관람객들은 거의 없고 문을 닫는 상점도 보이고 노점상도 몇 군데밖에 없었다.

코로나 19가 일상생활은 물론 경제 활동 전반을 마비시켜 버린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매표소 옆 부석사 입구로 들어서기 전 왼편에 있는 안내도를 잠깐 보면서 감회가 깊었다. 멀리 일주문은 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은 꼭꼭 숨어 있어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천왕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조금 늦게 찾아와서 그런지 양쪽으로 늘어선 앙상한 은행나무로 인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늦가을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을 때나 은행잎이 떨어져 있을 때가 일품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떨어진 은행잎도 없고 단지 구린 은행 냄새만 맡을 수 있었다.

<부석사 입구에 있는 안내도>
<부석사로 들어가는 길에 우뚝 버티고 선 일주문>
<은행나무의 잎들이 모두 떨어진 완만한 오르막길>

태백산부석사라는 웅대한 일주문을 들어서니 멀리 천왕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왕문 왼편에 위치한 거대한 당간지주(높이 4.8m)를 지나 천왕문 앞에 이르니 아직도 곱게 단풍을 물들이고 맞아주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반갑다. 부석사 무량수전으로 가는 길에는 유난히 돌계단이 많다. 천왕문 또한 돌계단으로 오르고 범종루와 안양루도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천왕문 양쪽으로 높은 벽을 큼직큼직한 돌로 반듯하게 쌓은 것에 감탄을 하면서 천왕문을 들어서니 목조 건물인 범종루에 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이 편안하게 맞아준다. 범종루를 지나 안양루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특히 가파르다.

<화엄종찰을 알리는 깃발을 꽃아 놓았던 당간지주>
<곱게 물든 단풍나무 그리고 돌계단 위의 천왕문>
<돌계단을 오르며 본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
<다시 돌계단을 올라 지나갈 수 있는 회전문>
<회전문을 들어가기 전에 있는 해우소 근처의 아름답게 물른 단풍나무>
<봉황산을 배경으로 단정하게 자리 한 범종루 그리고 앞쪽에 오른쪽과 왼쪽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
<곧 날아갈 듯 단아하게 서 있는 범종루>
<조금 비켜서 바라본 안양루와 일부가 보이는 무량수전>
<범종루 아래를 지나 반대편에서 바라본 범종루>
<안양루가 가는 길에 만난 노란 국화>
<범종루보다는 조금 무게를 느낄 수 있는 부석사 안양문>

안양루 아래를 지나 올라서니 석등이 보이고 뒤편에 그 유명한 무량수전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우선 무량수전에 들러 진흙으로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는 소조여래좌상 앞에 삼배를 올리고 밖으로 나오니 부석사 입구에서부터 무량수전까지의 오르막길이 얼마나 높은지 산아래가 아스라이 펼쳐지는 풍광에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무량수전 오른편으로 돌아가니 부석(浮石)이 보이고, 왜 부석이라고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읽었다. 부석사 입구에서 본 안내도의 조사당과 자인당 및 응진전까지 둘러보기 위해 무량수전 왼편으로 올라가 보았다.

<안양루 아래에서 바라본 석등과 무량수전>
<오른편에서 바라본 무량수전 전경>
<고려 공민완 친필이라고 하는 무량수전 편액>
<바깥에서 바라본 소조여래좌상>
<모범적으로 단정하게 서 있는 듯한 안양루>
<선묘와도 연관이 있고 떠 있다고 하는 부석(浮石)>

부석(浮石)에 대한 표지판에 적힌 내용을 추가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문무와 1년(661년) 의상 대사(義湘 大師)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 대사를 연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 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도로 달려갔을 때 의상 대사가 탄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 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뒤 의상 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를 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神龍)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들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 돌을 '부석(浮石)'이라 불렀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에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위 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부석을 보고 무량수전 앞쪽으로 돌아나오면서 내려다 본 전경>

무량수전 바로 왼편에는 아담한 선묘각이 있고, 조사당으로 오르는 길목에 삼층석탑이 있으며 거기서 산길을 약 100미터 이상 오르면 조사당과 자인당 및 응진전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데, 자인당과 응진당 쪽으로 가는 길은 공사 중이라고 되어 있어 조사당만 다녀왔다. 조사당은 숲 속에 있어서 그런지 낙엽들이 많이 떨어져 낙엽을 치우는 것이 일인 듯 보였다. 조사당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그 앞에 있는 선비화(禪扉花)로 유명하다고 한다. 선비화는 의상대사가 집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나무로 자라났는데, 실제로는 골담초(骨擔草)라고 한다.

<부석사을 있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 선묘를 기리는 선묘각>

부석(浮石)에 대한 추가 설명을 하면서 이미 언급은 했지만, 안내 책자에 있는 선묘(善妙) 설화를 옮긴다.

의상(義湘)이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등주에 있는 신도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신도의 딸 선묘(善妙)가 의상을 사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의연하게 대하는 의상의 굳은 의지에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공부와 교화, 불사에 도움을 드리겠다."는 원(願)을 세웠다. 훗날 의상이 떠난다는 소식에 미리 준비한 용품을 담아 해안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의상이 떠난 뒤였다. 선묘는 가져온 함을 바다에 던지며 배에 닿기를 기원하고, 용으로 변하여 대사를 모시고 불도를 이루게 해달라는 주문을 외우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신라에 귀국한 의상은 중생을 교화하던 중 676년(문무왕 16년) 태백산의 한 줄기에 절터를 발견하였으나 이미 다른 무리들이 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선묘룡이 나타나 큰 바위를 공중에 들어다 놓았다. 이에 놀란 무리들이 굴복하고 모두 의상의 제자가 되어 불사를 도왔다.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지었다. 그 부석은 무량수전 서쪽 암벽 밑에 있으며, 선묘룡은 무량수전 앞 석등 밑에 묻혀 절의 수호신이 되었다. 1967년 5월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이 설화를 뒷받침하는 5m 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굴한 바 있다.

<삼층 석탑 쪽에서 바라본 무량수전과 안양루>
<조사당쪽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산길>
<철망으로 보호하고 있는 선비화(골담초)>
<비스듬히 담아본 조사당과 선비화>

조사당에서 내려다보는 부석사의 전경의 멋진 풍경이었다. 초겨울인 지금이 나뭇잎으로 앞이 가리지 않고 훤히 보여 전체 풍광을 음미하는 데는 적절한 시기가 아닌가 여겼다. 천천히 내리막길을 조심해서 내려오면서 오랜만에 찾아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코로나 19로 바깥출입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지만, 고즈넉한 산사라면 언제라도 시간을 내어 심신을 단련하는 기회로 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마침 날씨도 포근하고 햇볕도 나지 않아 걷기에도 좋았다. 비록 부산에 먼길을 달려왔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고 밝은 마음으로 한나절을 보낼 수 있어 즐거웠다.

<조사당에서 내려오면서 바라본 삼층석탑, 무량수전 그리고 안양루>
<기품 있고 아름답기까지 한 무량수전 전경>

다음은 부석사 홈페이지(www.pusoksa.org/main)에서 가져온 부석사에 대한 내용인데, 부석사를 찾아가기 전에 미리 홈페이지부터 둘러보고 공부를 하고 갔으면, 더 찬찬히 부석사의 전부를 알 수 있었을텐데, 일주문부터 무량수전까지 일직선으로 올라가며 보이는 곳 위주로 들러보고 와서 다소 개운치가 않다. 우선 이번에 가서 둘러본 곳 위주로 정리를 해본다. 다음에 또 기회를 만들어 가면 그때는 이번에 둘러보지 못한 곳도 찾아볼 작정이다. 또한 의상 조사의 법계도도 써보고 싶고, 법성게도 외우고 싶다. 아직도 초겨울 속에 고요히 천년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는 부석사의 풍경이 아른거린다.

1. 부석사의 위치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전화번호 (054)633-3464, 팩스번호 (054)634-3464

2. 역사 속의 부석사

(1) 불교사적 위치 :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을 통하여 전입된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 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의 화엄종이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義湘)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 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2) 초기 : 중국 유학 후 수도처로 삼아 안주하다가 뒷날 거대한 사찰을 이룬 곳이다. 그러나 부석사의 생김을 정리한 역사적 기록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비석에 쓰인 몇 문자나 절을 재건한 기록 ‚ 보수한 기록 등만이 전한다. 부석사가 세워지기까지에 관해 ‘삼국사기’ 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하며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 고 전한다. 그리하여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처음 절이 생겨날 당시가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는 아니었다.

의상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소백산이나 태백산 등지에 초가를 짓고 불경을 강의하거나 토굴에서 화엄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은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의 부석사는 의상의 영정이 있는 조사당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몇 채 있는 아주 청빈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3) 중창 : 의상의 제자인 신림 이후 부석사는 인적 물적 측면에서 차츰 변화했다. 신림은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부석사의 화엄종을 크게 중흥시켰다. 또한 규모면에서도 크게 변모하여 현재 부석사의 기본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대석단과 석등‚ 석룡‚ 장대석‚ 석탑 등이 경문왕 무렵에 건립되었다. 대석단은 불국사‚ 원원사‚ 망해사 등에서 볼 수 있듯 신라 하대 이후에 세워진 사찰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양상이다. 무엇보다도 국보 제 17호인 석등이 경문왕 때(861년 ∼ 874년)에 만들어진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대규모 사찰 건립이 가능했던 것은 신림이 배출한 수많은 화엄 대덕들이 국가로부터 상당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예컨대 부석사에서는 신라 왕의 상을 그려서 벽화로 걸어 놓고 있을 정도였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벽화에 그려진 신라 왕의 상을 보고 칼을 뽑아 내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태백산은 신라 오악 가운데 중사를 지내던 곳으로 흔히 북악(北岳)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의상의 법손들을 북악파라고도 하였다.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신라 하대에는 대석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가람으로 많은 대중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변하였고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출가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4) 고려 이후 : 이곳의 주지로 있으면서 대장경을 인쇄하였고 그 일부를 부석사와 안국사에 봉안하였다. 따라서 지금 부석사에 전해지는 화엄경판은 원융대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구한말 민속학자인 이능화 선생의 화엄경판고란 책에 의하면 “고려 초에 태백산 부석사에서 2종의 화엄경을 목판에 각했다.”라고 하였다. 부석사에 현존하는 원융대덕의 비문에 의하면 그의 성은 김씨이고 자는 혜일이었다.

12세에 용흥사에서 출가하여 복흥사에서 수계 하고, 28세에 대덕이 되었다. 정종 때 왕사‚ 문종 때는 국사가 되었다. 그가 귀산사에 유행하였을 때‚ 꿈에 미륵보살이 나타나서 “네 품속에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해요 ‚ 다른 하나는 달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 일이 있은 뒤 자를 혜일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정종 7년(1041년)에 부석사에 들어가 화엄종통을 이어받았다. 1053년 부석사에서 세수 90세‚ 법랍 78세로 입적하자 왕은 원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석사 동쪽 언덕에 있는 원융국사비의 건립 연대는 명문의 마멸이 심하여 확인할 길이 없으나 입적 이듬해인 고려 문종 8년(1054년)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의상 당대의 부석의 모습과 그의 법손들이 줄곧 이곳에 주석해 온 것을 알려 주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있다. 기타 고려 때 많은 부석사의 건물들이 중창되거나 창건되기도 하였다.

(5) 조선 시대 : 조선시대에 부석사를 중수한 기록은 자주 발견된다. 조선 성종 21년(1490년)에 조사당을 중수하였고, 성종 24년(1493년)에 조사당에 단청을 하였다. 명종 10년(1555년)에 화재로 인해 안양루가 소실되었으며, 선조 6년(1593년)에는 조사당 지붕을 개수하였다. 선조 9년(1596년)부터 11년까지 석린 스님이 안양루를 중건하였다.

광해군 3년(1611년)에는 폭풍우로 인해 무량수전의 중보가 부러져 중수하였고, 경종3년(1723년)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했다. 영조 22년(1746년)에 화재로 승당‚ 만월당‚ 서별실‚ 만세루‚ 범종각 등이 소실되었으나 그 이듬해에 중수하였고 영조 44년(1765년)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했다.

(6) 근대 이후 : 일제 시대인 1919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허리 부분이 잘린 석룡(石龍)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 한 것도 이때라고 한다. 1967년에 부석사의 동쪽 옛 절터에서 쌍탑을 옮겨 범종각 앞에 세웠고 1969년에는 무량수전 기와를 갈았으며 1977년부터 1980년에 걸쳐 전체적으로 정화하면서 일주문‚ 천왕문‚ 승당 등을 신축하였다.

2. 화엄 사상

(1) 법계도(法界圖)

(2) 의상조사법성게(義湘祖師法性偈)

  •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원융뮤이상)  법과 성품은 원융하여 두가지 모양이 없나니
  • 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  모든 법이 움직임이 없어 본래부터 고요하다
  • 無名無相絶一切 (무명무상절일체)  이름 없고 모양도 없어서 온갖 경계가 끊겼으니
  • 證智所知非餘境 (증지소지비여경)  깨달은 지혜로만 알 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
  • 眞性甚深極微妙 (진성심심극미묘)  참된 성품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나
  • 不守自性隨緣成 (불수자성수연성)  자기 성품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더라
  • 一中一切多中一 (일중일체다중일)  하나 중에 일체 있고 일체 중에 하나 있으니
  • 一卽一切多卽一 (일즉일체다즉일)  하나가 곧 끝이 없는 겁이어라
  • 一微塵中含十方 (일미진중함시방)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머금었고
  • 一切塵中亦如是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다시 그러해라
  • 無量遠劫卽一念 (무량원겁즉일념) 끝이 없는 무량 겁이 곧 일념이요
  • 一念卽是無量劫 (일념즉시무량겁) 일념이 곧 끝이 없는 겁이어라
  • 九世十世互相卽 (구세십세호상즉) 구세 십세가 서로 서로 섞였으되
  • 仍不雜亂隔別成 (잉불잡란격별성) 잡란없이 따로따로 이뤘어라
  •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시변정각) 처음 발심 하온 때가 정각을 이룬 때요
  • 生死涅槃相共和 (생사열반상공화)  생사와 열반이 서로 서로 함께 했고
  • 理事冥然無分別 (이사명연무분별) 이와 사가 그윽히 조화하여 분별할 것 없으니
  • 十佛普賢大人境 (십불보현대인경) 열 부처님 보현보살 큰 사람의 경계더라
  • 能仁海印三昧中 (능인해인삼매중) 부처님의 해인 삼매 그 가운데
  • 繁出如意不思議 (번출여의부사의) 불가사의 무진법문 마음대로 드러내며
  • 雨寶益生滿虛空 (우공익생만허공) 보배의 비로 생명을 이롭게 한 일 허공에 가득 차니
  •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수기득이익) 중생들이 그릇따라 갖은 이익 얻음이라
  • 是故行者還本際 (시고행자환본제) 이 까닭에 수행자들은 마음자리에 돌아기기 위해서는
  • 叵息妄想必不得 (파식망상필부득) 망상을 쉬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네
  • 無緣善巧捉如意 (무연선교착여의) 인연 짓지 않는 좋은 방편으로 마음대로 잡아쓰니
  • 歸家隨分得資糧 (귀가수분득자량) 마음자리에 돌아감에 분수 따라 양식 얻네
  • 以다羅尼無盡寶 (이다라니무진보) 이 다라니 무진법문 끝이 없는 보배로써
  • 莊嚴法界實寶殿 (장엄법계실보전) 온 법계를 장엄하여 보배 궁전 이루고서
  • 窮坐實際中道床 (궁좌실제중도상) 영원토록 법의 중도 자리에 편히 앉아
  • 舊來不動名爲佛 (구래부동명위불) 억만 겁에 부동함을 이름하여 부처라하느니라.

 

3. 건축 문화재

(1) 무량수전(국보 제18호) :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 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 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년)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년)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1376년)에 원융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년)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으며 1969년에는 번와 보수를 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간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 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면석과 갑석을 짜 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 배흘림 ‚ 항아리형 보 등 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되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 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2) 안양루 :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 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 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3) 선묘각 : 선묘각은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의상 조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를 모신 건물이다. 규모도 작고 기단도 없이 초라하여 마치 작은 사찰의 산신각 같은 느낌을 준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가구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세의 건물인 듯하다. 내부에는 1975년에 그린 선묘의 영정이 걸려있다.

(4) 조사당(국보 제19호) :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 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진입하여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맞배 형식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넉넉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1916년의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에 의하면 조사당은 고려 우왕 3년(1377년)에 원응국사가 재건한 것이다. 조선 성종 21년(1490년)에 중수하고 성종 24년(1493년)에 단청하였으며 선조 6년(1573년)에는 서까래를 수리하였다.

(5) 범종루 :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루이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루는 지반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특히 이 범종루는 그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 있다.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팔작지붕을 한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왜 목수가 지붕을 그리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 지혜에 절로 감탄이 난다.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향하여 날아갈 듯이 앉아있는데 범종각이 정면을 향하고 있으면 건물이 전반적으로 무거워 보인다. 따라서 범종각을 옆으로 앉혀 놓고 뒤쪽을 맞배로 처리하여 건물이 전반적으로 비상하는 느낌을 주고 답답해 보이지 않아 좋다.

4. 가람

(1) 가람의 건축미 : 건축가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찰을 말하라면 대개 영주 부석사를 첫손가락에 꼽는다. 그만큼 부석사는 전통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멋과 맛을 모두 갖추고 있다. 신라시대 의상 조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법등이 끊기지 않은 오랜 역사성‚ 이 절만이 갖는 독특한 공간 구조와 장엄한 석축단, 당당하면서도 우아함을 보이는 세련된 건물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단련된 대목을 비롯한 많은 장인들의 체취가 베어날 듯한 디테일은 부석사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부석사의 우수한 건축미는 서양의 건축과 문화에 식상한 우리들에게 가슴이 확 트일 만큼 시원한 청량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앞으로 전통을 계승해 나갈 방향까지도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석사는 진정한 한국 건축의 고전(古典)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2) 가람의 입지 : 사찰을 보려면 먼저 건물들이 놓인 터와 그 주변의 산세를 살펴보는 게 순서이다. 놓일 자리에 따라 건물의 조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국(局)이 넓은 땅에서는 건물을 비교적 넓게 배치하되 높은 건물을 정점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으며 국이 좁고 가파른 땅에서는 높은 석축과 건물을 잘 이용하여 짜임새 있게 공간 배치를 하였다. 부석사의 경우는 물론 후자에 속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곳은 봉황산(鳳凰山, 822m) 중턱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태백산에서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달려 이룬 것이 소백산맥이다. 태백산에서 뻗은 줄기가 구룡산‚ 옥석산‚ 선달산으로 솟구치다가 소백산으로 이어져 형제봉‚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을 이루었다.
부석사가 위치한 봉황산은 선달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뻗은 줄기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문수산‚ 남쪽으로는 학가산의 맥이 휘어들고 서쪽으로 소백산맥이 휘어 돌아 거대한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위치하여 뭇 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봉황산을 향하여 읍하고 있는 형상이다. 풍수지리상으로도 뛰어난 길지에 속한다.


부석사가 들어선 터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다. 그나마도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어 경사가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석사에 들어서면 협소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솔길을 따라 절에 들어서면 높직한 석축단에 의하여 구분된 터에 드문드문 건물이 배치되어 있어 뒤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고 내려가는 길에는 건물 지붕 위로 보이는 전면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석양이 뉘엿거릴 무렵 안양루 쪽에서 멀리 도솔봉 쪽을 바라보면 펼쳐 있는 산맥의 연봉들이 장관을 이룬다. 초점이 되는 도솔봉 오른쪽으로는 아스라이 죽령이 보인다. 가히 대단한 경승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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